장치와 공백, 걷기와 라디오
장치를 만들며 그리워하기
매체를 접하며 가장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매체를 다루는 과정과 시간인 것같다. 작업에 몰두하여 그것을 만지는 시간을 통해 새로운 사유와 통찰을 늘 경험하게 된다. 도시 재생장치의 첫 번째 버전을 만들 당시 나는 기록 장치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고민했다. 기록은 어떠할까? 우리는 기록이라 하면 기록의 대상이 되는 데이터의 저장(encoding)이라고 인식하지만 그 이후에는 양자화 된 데이터를 해석(decoding)해내는 장치가 필수적이다. 저장은 재생과 떨어질 수 없는 관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기억/관습과 마주한다.어렸을 적 TV(테레비)는 늘 정해진 시간에 송출되는 방송에 접근하기위해 딱딱거리며 움직이던, 로터리를 원하는 채널에 맞추고 기다려야 하는 장치였다. 또한 그 채널 정보를 얻기 위해 매일 아침, 신문이 문 앞에 떨어지면 달려가 제일 먼저 편성표를 펼치고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치던 느낌을 떠올리게 했다. 또한 비디오 데크의 동그란 조그를 돌리며 원하는 장면을 여러 번이고 반복했던 손 끝의 느낌은 여전히 손에 남아있다. 그렇게 기록장치는 그 매체를 인식하는 사용자의 감각 바로 앞에 있다.
더 이상 내가 예전에 만지던 TV와 비디오는 내게 없다. 그렇게 여전히 남아있는 감각과 물건들 사이에는 큰 공백이 생겨버렸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오래된 기록과 재생장치에 대해 리서치를 지속했다. 그렇게 발견한 것이 포노토그래프이다. 포노토그래프는 입구의 깔데기를 통해 들어온 소리가 깔데기 끝의 잉크가 담겨있는 핀을 흔들게 되고 그때 손으로 돌려 종이를 지나가게 하면 종이에 그 떨림이 기록되는 장치이다. 하지만 만든 사람은 그것을 재생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저 소리가 기록이 되었다고 믿었다. 그 후 나는 포노토그래프에 정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이상 재생할 수 없는 감각 – “매체가 대체되어 기존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때 새롭게 피어나는 공간”을 상상하게 되었다.
우리는 장치를 만들며 그렇게 도시 재생장치 안에 다양한 이야기를 주워담았다. 포노토그래프처럼 실제 회전하는 기구를 제작하고 유리병을 데이터의 레코드라고 정의하고 우리가 표현할 종로구의 쓰레기, 전단지, 버려진 볼트, 전선 등 우리가 추억하고 기억할 수 있는 데이터의 조각들을 그 속에 담았다. 그리고 그것을 돌려 포노토그래프가 재생하지 못했던 데이터를 우리만의 방식으로 재생했다. 그렇게 장치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했다. [상기 이미지: 도시재생장치(2018)]
2019년 레지던시 기간중 제작했던 Finedust(2019) 또한 초기 영화를 상영하던 시절 광원을 위해 태우던 망간에 의해 피어나던 연기 때문에 평면의 화면에서 영화를 보는게 아닌 빛의 궤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유령같은 입체를 보았을 것 같았다던 이야기에서 착안해 조명을 활용해 대상을 비추는게 아닌 산란되는 궤작 자체에 집중하여 미세먼지 데이터를 표현하는 시도를 하였다. 그렇게 우리의 작업에서 이러한 장치들 공연에서 팀원을 연결시키는 인터페이스이며 음악과 데이터를 표현하는 재생장치인 동시에, 공백을 메우기 위한 장치로서 작동된다.
도시걷기와 라디오
라디오라는 장치는 상당히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소리의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서는 채널과 채널 사이의 노이즈의 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정해져 있는 양자화된 채널을 찾기위해 탐색하지만 채널 노브를 돌리며 그 사이의 무한하게 펼쳐져있는 손의 감각과 마주하게 된다. 어렸을 적 테이프에 원하는 노래를 기다리며 레코드 버튼 위에 손을 올려놓고 기다리던 기억, 나만의 트랙을 원하는대로 레코딩하기 위해 더블데크를 사용해 빨리감기를 누르고 탐색하며 원하는 앨범을 만들었지만 중간 중간 원하지 않았던 소리들이 들어와 속상했던 기억, 정확한 채널을 잡으려고 귀를 기울이며 노이즈에 들었던 기억, 옥상에 올라가 안테나를 조금 움직여보고 다시 집으로 내려오고 다시 옥상에 올라가기를 반복하며 달리던 기억,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잊혀진 라디오라는 장치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기억을 떠올리며 앞서 말했던 공백을 상상했다.
도시를 걸어가다 보면 수 많은 오브젝트가 내 눈앞을 지나간다. 거기에서 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느끼는 경험은 매우 단순하다. 소리가 나는 그곳에 그것이 있다는 것이다. 도시의 많은 웅성거림 속에서 그 소리를 인식하는 가장 쉬운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그 곳으로 걸어가면 된다. 카페에서 들리는 많은 소음은 개별적인 오브젝트로서 존재한다. 그것이 모여 웅성거림을 이루며 다시 개별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 위한 방법은 하나다 가까이 가서 귀를 기울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디어는 우리의 감각을 대치한다. 많은 소리가 섞여 들리는 두 귀를 모방하여 두 개의 스피커를 만들고 재현한다. 나는 이러한 전체성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 순간 내가 귀기울였던 라디오를 생각해냈다.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는 동안 나는 온전히 그 장치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라디오를 체험하지 못하는 공백 속에서 나는 도시걷기와 소리의 개별성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많은 수의 라디오를 통해 최대한 개별적인 소리를 만들어 도시 체험을 재현하는 장치를 만들기로 했다.
무엇이 라디오를 라디오라 부를까? 처음 기획엔 라디오를 비슷한 장치를 만들려했지만 그것은 라디오가 아닌 것 만 같았다. 우리는 라디오를 떠올리면 라디오라는 재생장치를 떠올리지만 라디오를 듣기 위해서는 노이즈와 노이즈 사이의 송출되는 무선의 소리 데이터가 필요하고 그것을 규격에 맞게 전송하는 만드는 송신안테나가 필수적이다. 그렇게 최대한 많은 수의 송신기를 만들고 각 주파수마다 다 다른 소리를 배치하여 송신한 다음 공연하는 인천아트플랫폼 곳곳에 라디오를 설치하여 다양한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 관객은 그렇게 공연중 인천아트플랫폼의 구석 구석을 걸으면서 체험하면 된다. 재생되지 않는 장치에서 공백을 느꼈던 도시재생장치의 첫 번째 버전에서 웅성거림 속 개별성을 탐색하는 재생장치 두 번째 버전이 제작되었다.